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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으악 조회 수: 26 PC모드
2013년 안전행정부가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1천 명과 중•고교생 청소년 1천 명을 대상으로 국민 안보의식 여론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6.25전쟁 발발 연도를 주관식으로 쓰라'고 하자 성인의 35.8%, 청소년의 52.7%는 정확한 답변을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안전하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조국을 위해 쓰러져간 수많은 항일 운동가와 6.25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6.25는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며 남한과 북한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과 소련, 중국까지 참여한 전쟁으로 ‘한국전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전쟁은 실제로 세계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장 규모가 큰 전쟁이며 상상할 수 없는 희생자를 만든 전쟁입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드디어 항복을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어둠의 시절은 끝나고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오는 듯했으나 그 통치 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전쟁의 승전국인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 외상은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게 바로 ‘모스크바 3상 회의’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지옥 같은 일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를 바랐으며 강대국들이 주장하는 신탁통치에 반대를 합니다. 전국적인 반탁운동이 일어났지만 전 세계가 미국과 소련을 기준으로 양분된 냉전시대라는 배경에서 남한에서도 ‘조선공산당’을 기준으로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는 다르게 정치적인 문제들로 점점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대로 남, 북으로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1947년 11월에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유엔 임시 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 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에 따라 유엔 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 해 5월에는 남한만의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그 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을 총선거가 실시된 합법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소련을 비롯한 공산 여러 나라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하여 분단이 공식화되는 비극이 시작됩니다.
그 뒤 소련의 지원을 받던 북한은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당시 국내외적으로 중국은 공산화가 완료되었고, 주한미군은 한국에서 철수를 했으며, 남한이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다는 점, 국군의 세력이 약했다는 것 등의 배경을 바탕으로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6.25가 일어나게 된 전반적인 배경이며 결국 북한 공산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합니다. 이후의 양상은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북한군의 남침 (1950. 6. 25)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총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국지적인 소규모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준비된 북한의 공격에 단 사흘 만에 서울을 뺏기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2. 유엔군의 참전 (1950. 7. 7)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후방으로 도망을 갔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를 필두로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차근차근 준비를 해온 북한군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고 부산까지 밀려나 낙동강 전선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9월 15일 새벽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바로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고 26일에는 서울에 진입, 드디어 29일에는 서울수복 기념식까지 거행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졌고 전쟁도 곧 끝날 거란 기대를 가지게 되고 한반도 통일을 위해 소련과 중국의 개입이 없다면 그들의 국경을 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이북에서의 군사작전을 결심합니다. 1950년 10월 1일 북진을 시작한 남한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 압록강에 이르렀습니다. 드디어 통일이 임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3. 중공군의 개입 (1950.10.25)
압록강까지 밀린 북한군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중국은 18만 명의 중공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전쟁이 더 커지는 양상으로 되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12월 10일 평양이 다시 중공군의 손에 들어갔으며, 1951년 1월에는 서울이 다시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남한군과 미군은 우월한 무기를 앞세워 다시 북한군을 몰아붙였고, 3월 5일에 서울을 되찾습니다. 글로는 이렇게 짧은 과정으로 표현되지만 계속되는 탈환과 재탈환 속에 실로 엄청난 수의 사망자와 피난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4. 휴전 (1953. 7. 27)
1951년 3월부터는 38도 선을 중심으로 조금의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는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양쪽에 피해만 가중되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서로 지쳐갑니다. 그 때문에 휴전 협정의 논의가 오가게 되는데 그 와중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보려는 것 때문에 쉽게 휴전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엔 안타까운 희생이 더 이어지고 나서야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맺어지고 지금과 마찬가지인 휴전선이 남게 됩니다.
강대국들의 욕심과 당시 이념의 갈등은 일제 식민 시대에서 갓 벗어난 조선의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참혹한 현실을 다시 안겨주었습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저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 때문에 수백만이 죽고, 1천만이 넘는 이산가족과, 거리에 넘쳐나는 전쟁고아들을 남기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겪었습니다.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업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북 분단은 현실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픈 역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다시는 겪어는 안 될 참극이며 많은 이에게 상처만 남겨준 전쟁입니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됩니다. 왜 이런 전쟁을 겪어야 했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경제 발전과 개인의 성공이란 목표 등을 이유로, 또는 지나간 과거라는 이유로 잊고 살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을 총선거가 실시된 합법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상황입니다.
올바르게 바꾸면 아래와 같습니다.
>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대한민국을 총선거가 실시된 지역의 합법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엔총회에서는 단 한 번도 대한민국을 한반도 전체의 합법정부로 승인한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의 합법정부였다면, 유엔총회 가입이 1992년까지 미뤄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강원도 인제군과 같이 북위38도선에 걸친 행정구역에서는 1957년까지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까지 그곳은 대한민국 영토가 아니라, 휴전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일시 점유한 곳으로 유엔이 인정하였고, 그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그곳에서 선거를 실시할 수 없었습니다.
여담이지만, 1960년 강원도 인제군 보궐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당선되었고, 그해 5월 16일 오전에 의원선서와 함께 의정활동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새벽에 일어난 5.16 쿠데타로 말미암아 무산되고, 아울러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정활동은 전혀 핮지 못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