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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선배 때문에 힘들었어요" 믿었던 후배의 폭탄선언

오마이뉴스2019.07.21 12:10
 
완벽한 선배와 후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글:신소영, 편집:이주영]

사십 대에 접어드니 지나온 시간이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서 방황하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들려주고픈, 지나갔지만 늦진 않은 후회입니다. <편집자말>

30대 중·후반에 잡지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할 때였다. 사장님이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우리 편집팀 막내에게 아침마다 커피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막내 직원이 말을 안 해서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됐는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커피 심부름은 당시만 해도 꽤 예민한 사안이었고, 상대가 '사장'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무척 고민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나'였다. 내가 커피를 갖고 사장님에게 올라갔다. 나를 본 사장님은 깜짝 놀라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이 "신 팀장이 직접 갖고 왔네" 하며 웃으셨다. "네, 우리 ○○씨가 아침에 일이 좀 많아서 제가 갖고 올라왔어요. 괜찮으시죠?" 나도 웃으며 사장님에게 커피를 드렸다. 다행히 사장님은 그 다음날부터 아침 커피 심부름을 끊었다.

월간지다 보니 야근이 많았지만, 팀원들에게 야근을 종용하진 않았다. 내가 더 일을 많이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다그치기보다는 들어주고 설득하는 편이었고, 팀원들의 편의와 요구사항은 어지간하면 들어주려고 했다.

사장님이 팀원을 부당하게 평가할 때는 잘하고 좋은 점들을 어필하기도 했다. 아부지만 너무 아부인 티를 내지 않는 선에서 사장님의 기분을 맞추며 꼭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팀원이 잘한 결과물도 가로채지 않았고, 팀장으로서 뒤에서 애쓴 것들을 일절 생색내지 않았다. 쓰다 보니 내 자랑이 너무 길어졌다만, 이만하면 좋은 직장 선배이고 상사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을 '나이스하고 쿨하게' 잘 해낸 건 결코 아니다. 솔직히 나에게는 버거운 자리였다. 그릇이 안 되는 상태에서 팀장이 되는 바람에 과도한 열심을 부렸다. 스트레스와 피로도가 엄청났다.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일을 좋아했고, 믿고 의지하며 소통할 수 있는 후배 덕분이었다. 4살 아래인 그 후배는 내게 큰 힘이 되어줬다. 전 직장에서부터 알고 지낸 그녀와 본격적으로 친해지게 된 건 그 회사에 오고 난 뒤부터였다. 워낙 성격도 좋고 일도 잘해서 호흡이 잘 맞았다. 내가 사장님이나 다른 팀원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땐 그녀에게 하소연할 정도로 의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사표를 쓸 수밖에 없게 됐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만두면서 그녀가 내내 마음에 쓰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덤덤했다. 기분 탓이겠지. 이상한 낌새를 내 기분 탓으로 돌렸다. 설마.

뭐가 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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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장님에게 한소리 듣거나 회의에서 깨지고 오면 '나 지금 화났어'라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다른 직원들이 속으로 '왜 저래?'하고 넘길 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사진은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스틸컷)
ⓒ tvN


설마가 진짜 사람을 잡았다. 퇴사하자마자 그녀가 나를 피하는 태도가 역력했던 것이다. 연락도 잘 안 되고, 겨우 오는 문자도 사무적이었다. 내가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에 차 한잔 마시자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나중에는 시간이 안 돼서 못 볼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시간을 돌려봐도 기억나는 사건이 없었다. 서운함이 가슴에 얹혀서 내려가질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메일로 이유를 물었다.

"사실 저 언니 때문에 힘들었어요."

답신에 적힌 그 말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후배에게 이런 폭탄선언을 들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인간적으로도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내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했는데, 후배 입장에서는 열정이 넘쳐서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팀장이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편하다는 이유로 가끔 내 업무 하중을 그 친구에게 넘긴 것 또한 그녀 입장에서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든 건 심기 관리였다. 나는 사장님에게 한 소리 듣거나 회의에서 깨지고 오면 '나 지금 화났어'라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다른 직원들이 속으로 '왜 저래?' 하고 넘길 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의지했던 만큼 그녀는 내 심기관리의 부담까지 지면서 감정노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해도, 은연중에 '그래도 네가 대리인데 팀장인 나를 이해하고 도와줘야지'라는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냈을 것이다. 정확한 선을 긋지 않은 관계는 그녀를 혼란스럽고 불편하게 하는 참사를 일으켰다. 내가 사장님과 팀원 사이에서 남모르는 수고와 스트레스로 힘들어할 때, 그녀도 분명 나와 팀원들 사이에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그것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언니가 그만둔다고 하니까 솔직히 해방감이 느껴졌다"는 말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마음을 서늘하게 베었다. 곪아 있던 감정이 터지면서 후배도 자기 감정의 실체를 처음으로 직면한 눈치였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마음 반, 부담스러운 마음 반이다 보니 그녀 역시 혼란스러웠을 테다.

그 메일을 읽고 마음이 아팠다. 연애하다 헤어졌을 때보다 더 욱신거렸다. 미움과 배신감, 미안함과 후회가 뒤섞여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녀를 배려하고 좋아한 내 노력과 마음이 한순간에 부정 당하는 것 같아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곳에서의 시간이 모두 실패로 낙인찍히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그때는 후배도, 나도 서툴렀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이만큼 하니까 네가 나를 위해 그 정도 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배 입장에서는 직장맘인 그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내가 얼마나 그녀의 일을 대신 떠맡고, 그녀의 승진을 위해 얼마나 사장님께 어필했는지 알 턱이 없었다. 후배 입장에서도 내가 알아채지 못한, 억울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 사연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서로 적당한 선에서 표현하는 생색과 솔직함은 필요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1년 뒤, 나는 어학연수에서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때 누가 먼저 연락을 했는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떻게 풀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다른 직원들과는 연락이 끊겼는데, 그녀와는 가끔이긴 해도 서로 안부를 나누며 산다는 사실이다. 14년도 지난 지금까지도. 뿐만 아니라 이직해서 다른 잡지 회사에 다니고 있는 그녀가 프리랜서인 내게 일을 주기도 한다. 이제 그녀가 갑, 내가 을로서 공생하고 있다. 삶은 참 재미있다.

그때는 그게 우리의 최선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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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에서 포털사이트 '바로' 대표인 권해효(민홍주 역)의 대사는 그런 나의 과거를 부끄럽게 했다. (사진은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스틸컷)
ⓒ tvN


요즘 '일잘러(일 잘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 여성들의 이야기인 tvN 드라마 를 보다가 간혹 그때 생각이 난다.

당시 내 딴에는 많이 배려하는 좋은 상사라고 자부했다. '내 딴에는'이라는 말이 얼마나 일방적 배려의 생색인지, 그 시절의 나는 몰랐다. 극 중에서 포털사이트 '바로' 대표인 배우 권해효(민홍주 역)의 대사는 그런 나의 과거를 부끄럽게 했다.

"내가 옳은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고 해도 한 가지만은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일 수 있다."

좋은 선배가 되는 일, 좋은 후배가 되는 일은 참 어렵다. 개인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은 이 두 가지다. 나의 사소한 실수나 무심함이 상대방에게는 큰 부담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위아래로 겪게 되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은 대부분 30대에 중간 관리자가 된다. 그때의 후배처럼 팀장과 말단 직원의 사이에서 끼거나, 내 경우처럼 대표와 팀원들 사이에 낀다. 위아래로 치이다 못해 사방으로 눈치까지 봐야 하는 위치다. 내 한계점 이상으로 한다고 하는데도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외롭기까지 하다.

여성의 경우,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하중은 배가 된다. 드라마 <검블유> 속 일잘러 여성들의 연대와 일하는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저들 중에 직장맘이 있었다면 저런 이야기가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내가 후배일 때는 선배의 못마땅한 모습을 보며 '나 같으면 저렇게 안 할 텐데' 하면서 반면교사로 삼았다. 그래서 선배가 되면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배가 된 나는 내 마음 같지 않은 후배들을 보며 '저렇게 하는 건 좀 아니지' 했는데, 어느 순간 나는 선배에게 그보다 더한 짓도 하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완벽한 선배나 후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 자리에 가야만 보이는 게 있다는 걸. 나는 내 자리에 와 보지 않은 후배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다. 직장맘이라는 후배의 처지에 가보지 않은 상황에서 지나치게 의존했다. 만약 나의 배려가 선의였다면 딱 거기서 끝내거나, 무언가를 바랐다면 입 밖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건 분명 내 패착이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다시 그런 상황이 된다 해도 난 아마 비슷할 것 같다. 그때의 그릇이 그만큼이었던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달라진 건 있다. 후배와 그런 일을 겪고 나서는 내가 상대를 위해 애쓴 부분은 적당한 수준에서 표현한다. 서로를 더 이해하고 덜 오해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친하다 하더라도 업무적으로는 선을 분명히 긋게 됐고, 내 감정이 상하는 일로 그 일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눈치 보게 하는 것은 일종의 '감정 폭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사건 이후로 덜 '개새끼'가 되기 위해서 조심하게 된 셈이다.

쓰지만 좋은 약이었다.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도 '나는 100점'이라고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며 살았을 테니까. 

이제 조직에 들어가 선배 노릇, 후배 노릇을 할 일이 없어서일까. 사람 때문에 화나고 사람 때문에 지치지만, 결국은 사람 때문에 위로받고 살 만했던 그 시간들이 가끔은 그립다.

치열하게 일하고 싸우면서도 필요할 땐 서로 손을 잡고 연대하며 함께 성장하는 <검블유> 속 일잘러 여성들의 모습이 드라마여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실제 그런 일들이 지금 어디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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