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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꽃남자 조회 수: 276 PC모드
중국의 오랜 격언 중에 "사슴을 쫓는다(逐鹿)"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사슴은 "천하"이며, 난세의 혼란기에 군웅들이 천하를 놓고 다툰다는 뜻이다. 원래 이 말은 한나라 초기 한신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권유했다가 뒷날 반란을 사주했다는 죄목을 체포된 괴통(蒯通)이라는 모사가 유방 앞에 불려갔을 때 "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세상의 모든 군웅들이 이를 쫓았다"라고 했던 것에서 나온 말이다.
국공내전은 대륙에서는 정치적인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농민을 舊 체제에서 해방하는 혁명전쟁이라는 의미로 거창하게 "해방전쟁(解放戰爭)"이라고도 부른다. 냉철하게 본다면 국공내전도 결국 중국 오천년 역사에서 왕조 말기마다 반복되었던 봉건적인 패권 싸움이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각각 삼민주의와 마르크스주의라는 그럴 듯한 이데올로기를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사람이 "천하"라는 사슴을 쫓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국공내전"이 아니라 장-모 전쟁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국공내전은 결코 이데올로기의 싸움도, 보수와 혁신의 싸움도 아니며, 강대국들의 대리 전쟁 또한 아니었다. 이 점이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던 또 다른 내전들, 즉 적백내전이나 스페인내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물론 남북전쟁과도 다르다. 노예 해방을 놓고 남부의 여러 주들이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된 남북전쟁은 자유주와 노예주라는 두 진영의 지역적 특색과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 때문이지, 링컨과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Finis Davis, 남부연합 대통령) 두 사람의 대결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서로의 진영을 대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단순히 국민당과 공산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그 자체였다. 그들이 없는 두 당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에 의해 국공내전은 시작되었고 두 사람의 죽음과 함께 국공내전 또한 자연스레 막을 내렸다. 그런 점에서 국공내전은 두 진영의 싸움이라기보다 두 사람의 싸움이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무력 통일의 포기와 양안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선언하였다. 오늘날 국민당은 타이완 독립을 외치는 민진당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50년대에 몇차례나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포격을 주고받았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많은 점에서 달랐지만, 또한 많은 점에서 놀라울 만큼 같았다. 같은 시대에 수많은 정치인들과 혁명가, 군벌들 중에서도 두 사람은 독보적으로 지도자로서의 리더쉽과 카리스마,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들은 국민이나 주변의 추대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투쟁을 통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권좌를 차지하였다. 또한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모순과 기만, 위선적이었다.
독실한 감리교도였던 장제스는 겉보기에는 청교도적인 엄격하고 금욕적인 삶을 추구했다. 하지만 세번째 아내이자 정치적 스폰서이기도 했던 쑹메이링의 눈치를 보면서도 뒤로는 종종 젊은 여성과의 스캔들을 즐겼다. 국민들에게는 검약할 것과 청렴함을 강요하면서 그와 친인척, 부하들은 권력을 이용해 온갖 사치와 부정비리를 저지르며 축재를 일삼았다. 그의 아내 쑹메이링은 중일전쟁 중 "외교 부인"이라고 불릴 만큼 국제 무대에서 뛰어난 화술과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했지만, 과도할 정도의 화려한 생활과 사치스러움으로 인해 그녀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가 상당부분 퇴색된데다 적대적인 미국 좌파 언론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장제스는 이들의 탐욕을 비판하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대 가장 부유한 중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비밀 계좌에 수억 달러의 정치 자금을 축적하였다.
반면, 마오쩌둥은 소탈한 이미지의 상징이었다. 중국계 미국인 여류 작가 창융이 쓴 《Mao: The Unknown Story》는 1990년대까지 서구 사회의 막연한 마오 신화의 베일을 벗겨내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상상과 의혹만으로 마오쩌둥을 지나치게 편파적으로 깎아내린 면도 없지 않다.
권위적이고 오만하여 국민과 완전히 고립되었던 장제스와 달리, 후난성 부농의 아들이었던 마오쩌둥은 평생 "농민의 아들"을 자처하면서 일반 농민들과도 격의없이 어울렸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지도자의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모습은 좋은 선전 거리였다. 비록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거의 실격에 가까웠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중국 사회에서 마오쩌둥 신화가 유지되는데는 바로 이런 모습 덕분이다.
물론 마오쩌둥의 이미지와 실제의 행동은 거리가 멀었다. 공자를 비판하고 20세기 진시황을 꿈꾸었던 그는 지식인에 대한 경멸감과 적대심을 숨기지 않았다. 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으며 그의 지시는 조령모개로 바뀌었다. 더욱이 그의 문란한 사생활은 장제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젊었을 때에도 억제라는 것을 몰랐던 그는 말년으로 갈수록 더했다. 곁에 수백여명의 "기쁨조"를 두었다는 것은 당 지도부 사이에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었다. 또한 그의 '검소한' 식단은 많은 비용이 들었고, 평소 값비싼 서구식 정장 대신 빛이 바랜 낡은 인민복을 즐겨 입으면서도 한쪽에는 사치스러운 전용 수영장을 운영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아집과 독선 덩이리였으며 남의 비판을 허용하지 못했다. 공은 자신에게, 과는 남에게 돌리는 것도 똑같았다. 혁명 중에는 구 체제의 부조리함을 비판했지만, 막상 권력을 잡은 뒤에는 급격하게 보수화되었고 중국 사회의 전통적인 봉건적인 관습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민중을 통제하였다. 특히 마오쩌둥이 5억 인민들에게 외우기를 강요했던 "마오쩌둥 어록"과 "마오쩌둥 선집"은 마치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또 한가지 공통점은 이들은 단순히 권력이 아니라 부강한 중국과 더 나은 인민의 삶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일인 독재를 고집하면서도 동시에 권력을 유지하는데 인민의 지지를 필요로 하였다. 방법과 사상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추구하는 방향은 같았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던 그들은 동양의 뿌리깊은 통치 이념인 유교적 왕도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점이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폭력적인 억압과 착취 밖에 몰랐던 스탈린이나 1960년대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서로 싸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자신이 주도하는 중국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1944년에 충칭에서 장제스를 만난 저우언라이가 "중국에서 유일한 민주 정권은 중공이다"라고 말하며 장제스 정권의 독재성을 비난했지만 과연 중공이 더 민주적이었던가. 마오쩌둥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서구처럼 국민의 손에 의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선택된 엘리트가 통치하되 다만 국민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장제스와 마오쩌둥 어느 쪽도 이인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이상 어떻게 해도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총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구 시대를 때려 부셨다고 떠들었지만, 막상 그가 부순 것은 장제스 정권 하나뿐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신중국"은 여전히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두 사람이 살았던 중국 사회는 오랜 관습이 지배하는 낙후된 봉건 사회였으며 대다수 중국 민중의 의식 수준은 수천년전과 다를 바 없었다. 서구화된 시민 계층은 이제 막 형성되고 있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지향하였건,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링컨이나 넬슨 만델라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2천년 전의 유방과 항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름아닌 이 점이 일본이 패망한 뒤 국공내전을 피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렇다면 장제스는 왜 마오쩌둥에게 패하였는가. 이것은 20세기 중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면서도 섯불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미국의 중국사 권위자인 로이드 E. 이스트만 교수의 저서를 비롯해,그동안 중국과 서구의 수많은 권위 있는 학자들은 나름의 견해를 제시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하지는 않았던가. 바로 역사를 연구하는데는 단순히 인물과 사건만 보아서는 안되며, 그 시대의 전후 상황과 문화, 풍습, 사상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오늘날의 잣대로 수백년 전을 평가할 수는 없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죽고 1년 뒤 국민정부가 북벌을 명령했을 때 장제스와 마오쩌둥 모두 권력의 중추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민당의 실세는 왕징웨이, 후한민, 라오중카이와 같은 쑨원의 정치적 동맹자들이었고, 공산당 역시 소련 유학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3천여명의 황푸군관학교 생도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정치 투쟁을 벌여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북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총사령관이 된 그는 숫적으로 10배나 우세한 북양군벌들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북상하였다. 군벌들의 가렴주구와 오랜 전란에 지쳐있던 인민은 열광하였다.
북벌전쟁부터 중일전쟁까지 그의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분명 탁월하였다. 그는 무력과 당근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겨우 3년만에 중국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신해혁명 이래 20년의 분열을 끝내었다. 또한 중앙집권화와 군비 감축에 반발하는 군벌들을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활용해 억눌렀고 6차례에 걸친 공산군 토벌작전을 추진하면서 공산군을 서북의 고립된 산간오지에 몰아넣는 한편, 류상과 롱윈과 같은 서부의 독립적인 군벌들을 중앙에 복속시켰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중일전쟁에서 장제스는 근거지를 잃고도 버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이 1937년 12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하는 순간 장제스 정권은 그대로 붕괴되고 중국은 친일 군벌들이 할거하는 시대로 회귀했을 것이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는 루즈벨트와 처칠과 함께 앞으로 세계 질서를 주도할 "4거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비록 스탈린은 일소중립조약을 이유로 장제스와의 만남에 난색을 드러내었지만 대신 오랜 분쟁의 대상이었던 북만주와 신장성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아편 전쟁이래 중국 외교 역사상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중국은 4대 강국의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는 장제스의 가장 큰 공이었다.
한편, 1930년대 중반까지도 마오쩌둥은 왕밍, 저우언라이, 보구 등 소련 유학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중공 지도부에서 "후난의 촌놈"으로 취급받았다.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그는 과감하게 반격했다. 한낱 비주류였던 그가 소련 코민테른의 후원을 받는 당 지도부를 일거에 뒤엎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량을 인정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류사오치 등의 후원이 컸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국민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지도력이 분열되고 지리멸렬 상태였던 중공을 단숨에 하나로 결집시켰고 나아갈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중공은 패망 직전에서 살아남았다. 이는 마오쩌둥의 가장 큰 공이었다.
1937년 7월 7일 소위 "7.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막을 열면서 자연스레 제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었다. "국공합작"이라는 단어에는 마치 대등한 두 세력이 대등한 관계에서 연합한다는 늬앙스가 담겨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 중국의 지도자는 장제스였으며, 중국 공산당이란 소련 코민테른에 종속된 하부 정치 세력일 뿐이었다. 또한 장제스의 목표는 수많은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던 중국의 통일이었고, 홍군은 단지 그 중의 수많은 걸림돌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이들이 10년 뒤에 힘의 격차를 뒤엎고 중국 전토를 장악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중공이 장제스 정권에게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면 장제스는 합작은 커녕 그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중공을 간단히 몰살시킬 수 있었지만 시안사건을 계기로 이전까지의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관대함을 발휘하여 중앙정부에 복종한다는 전제 아래 당시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약 10만㎢ 정도 크기의 산시성 북쪽의 황량한 산악지대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물론 마오쩌둥은 여기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설령 진심으로 복종한다고 해도 장제스가 언제 변덕을 부려 중공의 존재를 부정하고 토벌에 나설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목표는 중국의 변경지역에서 해방구를 건설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중국 전역에 "프롤레타리아 혁명"를 일으키는데 있었다. 국공합작이 결성되었을 때만 해도 "절대 복종"을 맹세했던 중공 지도자들은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에 모든 관심을 쏟는 사이 농촌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공은 본격적으로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1941년 1월 7일 안후이성 남부에서 벌어진 환남사변은 국공합작 이래 최악의 참사였지만 사실 이 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전부터 이미 반복되고 있던 일련의 사건들의 연장선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버마가 함락되어 중국이 봉쇄되면서 국민정부의 군사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중공에 대한 통제력 또한 약화되자 중공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특히 류사오치와 천이, 덩샤오핑에 의해 재건된 신4군은 환남사변으로 국민정부군에 강력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도처에서 국민정부군을 공격했다. 쌍방의 무력 충돌은 특히 공산군의 세력이 강력했던 제2전구와 제3전구에서 격화되었다. 또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과 내몽골, 창장 하류 일대에 해방구를 건설하며 영향력을 점점 확대해 나갔다. 1943년 2월 장제스가《中國之命云》에서 "일본은 피부의 병이요, 공산군은 심장의 병이다(日本是皮肤之患,共产党是心腹之患)"이라고 한 것 역시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말자 국공 양측이 즉각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양측의 증오심고 불신감은 이미 씻을 수 없었기에 누구의 중재도 소용이 없었다. 중국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시도한 미국의 어설픈 중재는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갔고 스스로의 체면만 깎아내렸다.
국공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장제스는 모든 면에서 유리했다. 국제 사회에서 그는 오랫동안 "중국 유일의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중국 전토의 3/4을 장악하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미국의 강력한 원조를 받고 있었고 94개 사단 200만명의 정규군을 보유하였다. 그 중에 미국식으로 편성된 엘리트 부대는 약 30만명 정도였으며 나머지 역시 항복한 일본군에게 넘겨받은 막대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장제스 직계의 지휘관들은 장제스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갖추고 있었고 현대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중공은 재정적으로 매우 빈약했으며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비밀리에 아편을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옌안에는 미국과 소련인 고문단이 체류했고 중공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본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쳐 외부로부터 아무런 실질적인 원조를 받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불신했기에 장제스와의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굳이 중공을 후원할 생각이 없었다. 변덕스러웠던 미국 역시 1944년 내내 몇번이나 중공과의 합작을 시도하여 장제스를 긴장시켰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공산군은 120만명 정도였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일본 패망 직전에 입대한 자들이었다. 병사들은 열의는 있었으나 기초적인 군사 훈련조차 받지 못했고 간부들 역시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중화기는 고사하고 소총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펑더화이나 린바오, 류보청, 주더와 같은 공산군의 최고 지휘관들은 정규전에서 대부대를 지휘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더욱이 최고 사령부는 수백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대를 통합적으로 지휘하면서 유럽 대륙 전체보다 더 넓은 전역에 대한 체계적인 병참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역량이 전무하였다. 따라서 장제스가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고심하고 있을 때 그의 참모장이었던 웨드마이어 중장은 성급하고 충동적인 공격을 자제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렇다고 장제스가 4년만에 패배하여 대륙에서 쫓겨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장제스는 패배하고 마오쩌둥은 승리했는가. 마오쩌둥은 자신의 어록에 특유의 문학적인 소양을 발휘해 "인민해방군의 용맹함"과 "장제스 정권의 타락", 특히 "중국 공산당이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라며 장황하게 얘기했지만, 일정 부분은 진실이라고 해도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큰 원인은 첫째로 장제스 정권의 내분, 두번째로 전략적 방만함에 있었다. 국민정부 내에서 장제스의 권위는 매우 취약했다. 국민당은 수많은 파벌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反장제스 파였다. 군부는 크게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황푸파와 서북군벌 펑위샹의 영향을 받는 바오딩파, 광시군벌 리쭝런의 광시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그렇다보니 국민정부군은 통합된 군대가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군대가 연합한 연합군에 가까웠고 내전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휘권의 통일을 실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휘관들은 결속감이 거의 없었기에 서로 협력을 거부하였고 공을 다투었다. 상급 지휘관은 물론, 심지어 장제스의 명령조차 무시되기 일쑤였다. 적진 깊숙이 무리하게 진격하다가 사방에서 포위 섬멸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과거 일본군이 보여준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격이었다. 장제스 비장의 5대 주력 중 하나인 제74군이 전멸당한 멍량구(孟良崓) 전투나 국공 최대의 결전이었던 화이허 전역의 참패는 국민정부군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반면, 공산군은 지휘권을 통일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으며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가장 불리한 상황에 몰렸을 때에도 항복하는 대신, 전열을 유지한 채 후퇴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또한 일선 지휘관들은 상층부의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않아도 주변의 우군과 협력하면서 능동적으로 전세를 이끌 수 있었다. 이는 당 지도부가 그들에게 최대한의 재량을 부여하고 간섭을 최소화하였기 때문이었다. 실전을 통해 부족한 경험을 보충하였고 실수는 금새 바로잡았다.
장제스는 일선 지휘관을 불신하고 마구 간섭을 일삼으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의 입장에서는 일정 부분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최고 지휘관들은 우유부단했고 기회가 주어져도 능동적으로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동북의 패배는 동북초비사령관이었던 웨이리황의 소극성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또한 무능한 참모들로 구성된 국민정부군의 최고 사령부는 방대한 전역을 지휘할 역량 자체가 없었다.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과 권위를 가진 사람은 오직 장제스 밖에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나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전선에서 수천km 떨어진 최고 사령관의 무리한 명령은 득보다 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손자병법 모공편을 보면, 임금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군대에 간섭을 일삼으면 혼란에 빠진다며 경계하였는데 장제스는 이를 어긴 셈이다.
반면, 마오쩌둥은 소위 "16자 전법(敵進我退 敵止我搖 敵疲我打 聲東擊西)"이라는 추상적인 원칙만 제시했을 뿐 실제 작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은채 전적으로 일임하였다.
장제스의 과도한 간섭으로 인해, 국민정부군의 전략적 우위는 전술 단위에서 쉽게 무의미해졌다. 더욱이 그는 어리석게도 단기결전에 매달려 6개의 전선(동북, 서북, 화북, 내몽골, 산둥, 화중)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였다. 공산군은 주로 공격하기 어려운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었기에 전략적 우세함은 상쇄되어 버렸고 병력이 분산되면서 어느 전선에서도 이길 수 없었다. 가장 실패한 쪽은 최정예 부대 30만명이 투입된 동북이었고 사실상 여기서 승패는 결정났다. 린뱌오에 의해 국민정부군은 선양과 창춘 등 몇개의 도시에 고립된 채 아사 상태에 직면하자 손쉽게 백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팽팽했던 전선의 균형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1년 뒤 장제스는 대륙을 떠나야 했다.
장제스의 공격은 분명 무리한 것이었다. 그의 군사 고문이었던 웨드마이어 장군은 국민정부의 취약성을 들어 절대 공산군을 먼저 공격해서는 안되며, 동북을 포기하고 산하이관 이남을 굳히라고 권유하였다. 또한 동북을 유엔에 의한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 이는 분명히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왜 거부했는가.
우선 동북은 일본이 건설한 강력한 대규모 군수시설과 중화학 공업단지, 발전설비가 있었고 동북의 경제력은 본토의 몇배에 달했다. 그것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중공이 동북을 차지한다면 그야말로 날개를 다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만주 사변 이래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동북을 다시 외세에게 넘긴다는 것은 중국의 위신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며 국민들의 강력한 지탄에 직면할 것이었다.
그보다도 더 큰 이유는 중공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 때문이었다. 그는 만약 중공을 그대로 둔다면 몇년 안에 국민당 전체가 공산당에게 넘어가 싸우지도 못한 채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미 노쇠하고 부패한 국민당은 도저히 공산당의 상대가 되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장제스의 과도한 편집증이었다. 중공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그들이 교묘하게 파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꾸어 중공의 확장을 저지하는 최선책은 전쟁이 아니라 강력한 통치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중국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미국과 주변 측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급하게 선제 공격을 명령함으로서 정치적 명분을 상실하였다. 이는 그가 중공의 정치적 역량은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반면, 군사적 역량은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였다.
그동안 장제스가 대륙을 상실한 것에 대해, 중국과 타이완, 서구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제각각의 해석을 내세웠다. 마오식 사관에서는 강대한 장제스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마오쩌둥의 군사적 역량과 지도력에 있으며, 장제스 정권의 부정부패함을 부각하면서 홍군의 모범적인 모습이 인민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지 캐넌과 애치슨 등 장제스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던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부 관료들 역시 장제스 정권의 후진성과 부패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맥아더를 비롯한 공화당 인사들은 트루먼 행정부의 우유부단하고 원칙없는 대중정책이 중국을 잃게 했으며 장제스는 미국의 잘못된 정책의 피해자라고 주장하였다.
장제스는 대륙으로 쫓겨간 뒤, 패배를 분석하면서 "당의 무너진 기율, 군 지휘관들의 의지 부족과 상호 협조 결여, 미국의 훼방, 제5열의 존재" 등을 꼽았다. 그는 원색적으로 국민당과 고위 지휘관들의 무기력함을 지적하면서 "이 따위 당은 진작에 때려 부셔야 했다"고 비난했다. 정작 그 정점에 있는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은 망각한 듯 하다. 그의 무책임한 모습은 1940년 12월 그리스 전역에서 실패했을 때 "오늘날 파시스트 이탈리아인은 1914년의 이탈리아인보다도 못 하다"라고 했던 무솔리니를 연상케 한다.
이 모든 주장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장제스 정권이 부조리함했다고 해서 반대로 마오쩌둥 정권은 부조리하지 않았던가. 한쪽의 문제만 내세운다면 그 이면을 볼 수 없게 된다. 즉, 국공내전의 결과를 단순히 장제스 정권의 부조리함에 돌리는 것은 지엽적인 시각으로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국공내전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장제스 정권의 부조리함은 장제스 정권이 만들어낸 부산물이 아니라 중국 사회의 낙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장제스 정권이 중국 사회를 낙후시킨 것이 아니라 중국 사회가 낙후되었기에 장제스 정권 역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인과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공산당 역시 정권을 잡자말자 장제스 정권의 행태를 고스란히 답습하여 관료들은 부패하고 나태해졌고 평등은 사라져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공산당은 정치 권력을 인민에게 돌려주지 않았는가. 어째서 그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구 체제의 부조리함을 그대로 답습했는가. 애초에 중국공산당은 장제스 정권의 부조리함 때문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혼란기에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패권 싸움을 하여 정권을 잡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국공내전의 성격은 기존 체제의 모순으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 적백내전과 다르다.
장제스 정권이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첫째로 군사적 열세가 아니라 정권의 모순에 있었다. 타이완으로 간 장제스는 패전의 원인을 연구하면서 국민정부와 군 곳곳에 침투했던 제5열에게 책임을 돌렸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것이 아니다. 1936년 12월 공산당에 입당한 후 저우언라이에 의해 후쭝난의 고급 참모로 침투했던 슝샹하이(熊向暉)는 중공의 대표적인 첩자이었으나, 대다수는 처음부터 공산군이 침투시킨 첩자가 아니라 장제스 정권의 부조리함에 실망하여 뒤늦게 스스로 전향한 자들이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장제스에게 있다.
국민정부군이 붕괴된 가장 큰 책임 또한 장제스에게 있다. 충분한 준비 없이 성급한 공격과 과도한 병력 분산으로 일시적인 우세함은 금새 사라졌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 주력 부대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그는 마땅히 철수시켜 전선을 축소시켜야 함에도 우물쭈물하면서 고집을 부렸다. 마오쩌둥은 하늘이 내린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전략적 반공"으로 바꾸어 분산되고 고립된 국민정부군을 각개격파했다. 첩자들의 역할은 한낱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1948년 말에 동북과 화북, 화중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이른바 "3대 전역"은 결정적이었다. 국민정부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했다. 싸울 의지마저 잃은 군대는 이탈하기 시작했고 정치가, 지식인들, 관료들 역시 앞다투어 중공으로 넘어갔다. 이는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지위와 재산, 목숨을 보존받기 위해서는 승자 쪽에 붙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침몰해 가는 거함과 명예롭게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만큼 장제스 정권이 사상 누각마냥 취약하고 결속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두번째는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었다. 미국은 내전을 반대하면서도 막상 장제스가 내전을 결정하자 10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를 제공하고 항공기와 군함을 투입해 병력을 수송하였다. 국공내전 중에 미국이 장제스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제공한 금액은 무려 60억 달러에 달했다. 마셜 플랜으로 서유럽 부흥을 위해 미국이 서유럽 동맹국들에게 제공한 돈이 102억 달러 정도였다는 점에서 이는 엄청난 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장제스 정권에게는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다. 미국의 차관은 국민정부군의 군사작전을 지탱하는 생명줄이었지만 그로 인해 고위 지휘관들은 나태해지고 축재에만 열을 올렸다. 누구도 열심히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군사비와 부패한 관료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면서 중국 경제의 재건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의 관전 장교들은 국민정부군이 타락하여 중일전쟁 당시의 열의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장제스는 스스로 뭔가를 해쳐나가려고 노력하는 대신 더욱 미국에 매달렸다. 미국이 등을 돌리자 정권 자체가 붕괴되었다.
세번째는 장제스의 결단력 부족이다. 그는 내전이냐, 대화냐 어느 쪽도 분명하지 못했고 미국의 눈치를 보았다. 루즈벨트와 마찬가지로 선유럽 정책을 고수하던 트루먼 행정부는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을 일본에 두었고 중국이 현상유지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장제스가 내전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고 이미 내전이 시작된 뒤에도 몇차례나 공격을 중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장제스는 이를 "내정 간섭"이라고 묵살할만큼의 결단력과 베짱이 없었다. 그로 인해 초반의 유리한 전략적 유리함을 제대로 살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내전 초반 남만주에서 연전연패했던 공산군은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었다. 만약 장제스가 처음부터 전쟁 이외에 방법이 없다고 결심했다면 일본이 항복했을 때 마오쩌둥과 어설픈 협상을 벌이는 대신 공산군이 더 강해지기 전에 즉각 공격했어야 옳았다.
결국 그가 패배한 원인은 바로 이 세가지에 있었던 것이다. 다른 요인들은 한낱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마오쩌둥의 느긋함은 조급했던 장제스와 대조된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기에 있었다. 인내심 하나로 정권을 잡았던 그는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오자 잠깐의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단숨에 폭풍처럼 몰아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수천km의 거리를 공산군은 마오쩌둥에 떠밀려 변변한 차량도, 병참선의 뒷받침도 없이 오직 두발만으로 1년만에 주파했다. 이것은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조차 해내지 못했던 일이다.
내전 말기에 민주동맹과 같은 재야 인사들은 물론이고, 국민정부의 많은 지도자들과 관료, 지휘관들조차 장제스를 버리고 공산당으로 전향한 이유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마오쩌둥이 장제스보다 훨씬 온화하고 관대함과 포용력을 가진 지도자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것은 그가 권력을 잡은 뒤의 얘기이다. 만약 장제스에게도 마오쩌둥과 같은 인내심이 있었다면 국공내전의 향방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중공은 "토지개혁"으로 인민의 마음을 얻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상투적인 프로파간다이다. 물론 국공 내전 초반에 패배했던 공산군이 산악지대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농민들이 열렬하게 중공을 지지했다는 주장 또한 과도한 비약이다. 중국 민중이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개혁"이 아니라 "안정"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 따위보다 먹고 사는 일이 전부였다. 1927년에 장제스의 북벌전쟁에 인민들이 열광했던 것도, 1949년에 인민해방군의 남하에 인민들이 열광했던 것도 다름아닌 "안정"에 대한 갈구였다. 대다수 민중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내전을 남의 일인양 방관했다. 어느 쪽이 이기건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장제스가 웨드마이어의 조언을 받아들였거나 또는 산하이관 이남을 굳히면서 중공을 동북으로 몰아넣었다면 어떠했을까. 여기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미국의 역사가 스티븐 엠브로스의 《만약에?(What IF?)》에서 한 챕터를 통해 다루고 있다. 그는 장제스가 동북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대신 보다 싸우기 쉬운 본토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며 중공은 동북에서 고립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폴란드나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장제스는 동북의 공업력이 중공의 손에 넘어간다면 힘의 균형이 역전될 것을 우려했지만, 오히려 마오쩌둥은 무리한 경제 정책으로 동북을 파탄지경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미국의 부흥 계획에 따라 1950년대와 60년대에 전례없는 경제 호황을 누렸을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 양안의 관계는 역전되어 민주 타이완이 공산 대륙에 흡수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 민주 대륙에 공산 만주가 흡수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을까.
또 한가지 흥미로운 가정이 있다. 만약 장제스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였다면? 이는 결코 허황된 가정이 아니다. 제1차 국공합작을 앞두고 장제스는 쑨원의 명령을 받아 1923년 9월 2일부터 11월 29일까지 소련을 방문하였다. 그는 약 3개월 동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체류하면서 소련의 당, 군, 관의 조직을 보고 배웠고 주요 공장과 소비에트 전당대회장, 사관학교를 견학하였다. 만약 그가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되어 공산당으로 전향했다면 황푸군관학교와 소련의 원조를 받아 공산당은 물론 국민정부를 통째로 장악했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국공합작의 결렬도, 대장정도 없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어쩌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할 기회조차 없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올해 2월에 출간된 필자의 첫번째 도서인《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는 아마추어 역사 작가가 쓴 졸필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예상 외로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 부족함 투성이라 한없이 부끄러우면서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의 동향에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은 우리와는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시중에는 수많은 중국 관련 서적이 나와 있다. 하지만 대부분 주요 중국 지도자들의 인물 평전이거나 경제, 문화, 여행에 대한 것들이다. 청조 이전의 역사서는 많지만 막상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는 당시의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매우 재미있고 흥미롭게 쓴 책이지만, 정통 역사서라기에는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이야기도 종종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다. 현이섭씨의 논픽션 소설인《중국지》또한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사람의 대결을 중심으로 다룬 흥미로운 책이지만 마오쩌둥 회고록에 기반했기에 다소 공산당에 편중되었다는 점이 한계이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진행된 국공내전은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와 세계사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공내전을 반드시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필자 개인의 흥미도 있다.
빈약한 자료와 어설픈 식견을 가지고 거대한 전쟁에 덤벼드는 것이 주제넘는 짓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이니 삼민주의이니 따위의 복잡하고 딱딱한 정치 이야기는 필자의 관심 밖이기도 하다. 다만 국내에 국공내전을 다룬 책이 거의 없다는 점을 무기삼아 군사 매니아로서 전쟁의 흐름과 주요 군사작전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일단 써놓고 부족한 부분은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갈 생각이다.
모택동을 필두로 한 중국공산군의 대장정의 기적 역시 중국 현대사의 놀라운 장면이지만
그 짱짱하던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타이완으로 쫒겨난 것도 놀랍기 그지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