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est Posts Recent Comments 문의사항 신고하기 이용안내 이벤트 포인트 리스트 공지사항 관리자문의

공지사항

고정공지

(자유게시판에서 질문 금지) 질문하신 유저는 통보 없이 "계정정리" 될수 있습니다.

Warning!  자유 게시판에서 질문을 하시면 바로 강퇴 됩니다.
분류 :
사랑
조회 수 : 175
추천 수 : 0
등록일 : 2018.04.12 06:42:19
글 수 21,850
URL 링크 :

[삶의 한가운데|별별다방으로 오세요!]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일러스트일러스트=안병현
봄이 오는 꽃길을 걷노라면, 나는 아직 이 길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주인은 아이들, 그리고 어쩌면 노인들…. 나란히 걷는 백발의 부부를 보며 그들이 걸어온 인생길을 생각해봅니다. 꽃길만은 아니었을, 그러나 꽃길보다 더 아름다웠을 그 길을….

홍여사 드림

며칠이나 갈까 했는데,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아들이 전화하더군요. 엄마, 간밤에 편히 주무셨어요? 아침은 잘 잡수시고? 아버지는 어떠세요?

매일 똑같은 질문이고, 그에 대한 저의 대답 역시 똑같습니다. 우린 좋아. 바쁜데 끊자. 아버지가 뭐라 하신다.

아들은 출근길에 5분 정도는 짬을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매일 아침 안부 전화 거는 습관을 들여보겠다고도 합니다.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닌데, 제가 괜한 소리를 해서 무척 신경 쓰이게 한 모양입니다.

하긴 잘하는 일이긴 합니다. 서로 무탈하게 지낼 때에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아버지가 병중이면 아들도 마음을 달리 먹어야지요. 남편은, 작년 가을에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후두암으로, 수술을 받았지요. 비교적 일찍 진단받아 예후가 희망적이기는 합니다만, '암'이라는 한 글자가 휩쓸고 간 것만으로도 우리 부부의 일상은 휘청거렸습니다. 이만하길 다행이다, 우리 두 사람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다짐하지만, 몸과 마음에 닥쳐오는 쓰디쓴 변화들에 한 번씩 기가 꺾이곤 했죠. 그럴 때 저는 마치 두 개의 절벽을 잇는 낡은 통나무 다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쪽에서는 남편이 아파하며 저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저쪽에서는 한창 바쁘게 사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상태를 저에게 묻습니다. 제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생각으로 저는 양쪽을 향해 씩씩한 미소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병이 났죠. 3월 들어서며 맥이 빠지더니 보름을 앓았습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암 환자한테서 밥상을 받고 있더군요. 창밖엔 어느새 봄이 와 있고, 남편은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다래져 있습니다. 남편이 노트에 글씨를 써서 저한테 내미네요. 꽃 보러 안 갈래?

매년 이맘때 하던 대로 뒷산에 산수유, 매화를 보러 가자는 것이지요. 그 말을 목소리가 아닌 글씨로 전할 뿐, 달라진 건 없습니다. 저는 남편의 글씨체를 새삼 들여다보았습니다. 확실히 명필은 아니네요. 글씨 보고 어떤 여인이 마음을 줄 리는 없겠습니다. 저는 옷을 꿰입고 남편 팔짱을 꼈습니다. 가요, 어디 봄꽃 보러.

남들은 웃을지 모릅니다만, 저는 늘 남편을 밖에 내놓기가 불안했답니다. 키도 작고, 지갑도 얄팍한 사람이지만, 남편에게는 누구와도 비할 바 없는 매력 포인트가 있었으니까요. 남편은 음성이 참으로 듣기 좋은 사람입니다. 그 아담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울림 좋은 소리가 나올까요. 더구나 사투리를 고치지 못하는 저한테는,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가 황홀할 지경이었습니다. 실은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제 이상형이 그랬습니다. 좋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 돈보다도, 키보다도, 무엇보다도 음성이 좋은 사람. 그런 말을 하고 다닌 것도 아닌데, 지인이 어떻게 알고 남편을 제 앞에 데려다 놓은 겁니다. 인물은 없어도 성품은 나무랄 데 없다던가요? 저는 그 친구에게 모르는 소리 말라고 했습니다. 성품보다 음성이 끝내주는 사람이더라고.

그런 사람이 병마와 싸우다 목소리를 상했습니다. 수술 후, 목이 쉬고, 음량이 형편없이 작아졌죠. 귀를 기울이면 알아듣긴 합니다만, 남편 본인이 필담을 선호합니다.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아내에게 들려주기 싫은 모양입니다. 가뜩이나 둘만 남은 집안에, 사각사각 펜대 굴리는 소리만 들립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남편이 쓰는 글자들은 제 머릿속에 음성이 되어 우렁우렁 울려 퍼지니까요. 사십 년 같이 살다 보니 그런 초능력도 생기더군요.

돌이켜보면 저는 지난 사십 년간 충분한 호사를 누렸습니다. 여보라고 불릴 때마다 가슴이 설�던 건 아니지만, 밤이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가 자장가에 빠지듯 잠이 들었죠. 부부 싸움을 할 때도 부드러운 음성 때문에 싸울 의욕을 잃었고, 애들을 야단칠 때도 남편을 앞세웠습니다. 당신이 알아듣게 타일러봐요. 저는 누구라도 남편 말은 귀 기울여 들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반했듯이, 어느 여인이라도 반할 만하다 생각했죠. 그러니 불안할 수밖에요.

그 불안이 현실이 되었던 적도 있었네요. 우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흔 고개를 넘고 있을 때쯤입니다. 남편이 잠시 한눈을 팔았었죠. 웬 여인에게 정신이 팔려, 한동안 오매불망이었죠. 저는 끝내, 그들이 얼마나 깊은 관계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선을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 누가 압니까? 그러나 저 달콤한 목소리로 온갖 사탕발림을 다 했으려니, 나한테 한 말을 고대로 했으려니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뼈가 녹도록 괴로웠죠. 가장 고왔던 것이 가장 미워지는 법인 기막힌 이치를 그때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절마저 그립습니다. 다시 그 울림 좋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여인과 조금 나눠 듣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저는 그 목소리를 아들한테서 찾아내고 감격했답니다. 아들 목소리가 그렇게 아빠를 빼닮은 줄을 미처 몰랐네요. 한참 밉고도 곱던 마흔 살 무렵 남편의 목소리를 아들이 고대로 냅니다. 하도 신기해서, 아들한테 그리 말했더니, 이 녀석이 매일 전화를 걸어주네요. 엄마! 하고 불리면 가슴에 소나무 향이 쏴 밀려듭니다. 아들 낳길 잘했다고 처음 느낍니다. 이 이상 무슨 효도를 바랄까요.

남편과 나란히 뒷산을 오르며 꽃구경을 했습니다. 우리는 늙었지만, 매년 피는 봄꽃은 한결같네요. 저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남편한테 물었습니다. 당신은 내 어디가 좋았던 거야? 그러자 남편은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쓱 꺼냅니다. 그리고 글자를 적습니다. 각. 선. 미.

우리는 깔깔 웃으며 남은 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누가 짐작이나 할까요? 한때는 각선미가 끝내줬던 여자와, 목소리로 여자들을 울렸던 남자라는 걸. 내 지난날의 각선미를 기억해주는 단 한 사람이기에 저는 이 사람을 놓칠 수가 없나 봅니다.
이전글 다음글

명장클럽

2018.04.12
14:32:16
잔잔하네요..

제비날다

2018.04.12
17:02:54
마눌님에게 충성해야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불편 ※ 박제 (댓글도배) 리스트 ※ (Updated 2019-08-21) [14] file 은소라 2019-08-13 2227
공지 정보 오에스 매니아 [ OSManias ] 게시판 및 댓글 이용 안내 [ V : 3.0 ] UzinSG 2019-04-30 2886
공지 정보 오에스 매니아 [ OSManias ] 게시판 이용 안내 [ V : 3.0 ] UzinSG 2019-04-30 2173
공지 불편 오매에서 주관적인 댓글 작성하지 마세요 [56] file Op 2019-04-10 3018
14778 일반 사랑받으며 자란 티 [4] file 응딱 2018-04-27 176
14777 일반 노쇼 [3] 강글레리 2018-04-04 176
14776 정보 현제 컴xx님 자료 바이두로 받는분 보세유 [2] 피터팬 2018-01-16 176
14775 고충 [OS 설치]이걸 피드백으로 쓸까...자유게시판 고충에 쓸까 고민하... [4] 天殺風™ 2018-01-09 176
14774 일반 소래습지 생태공원 . . . [2] file anamana 2017-10-28 176
14773 정보 컴이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됐어요. [4] file 초록별전설 2017-09-27 176
14772 일반 CorelDRAW 2017 색상팔레트 버그 입니다. [7] file 코렐매니아 2017-09-06 176
14771 일반 미니소 블루투스 스피커 170개를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10] file 반돌 2017-08-02 176
14770 일반 오늘 삘받아서 윈7->10업그레이드 했습니다. [6] file 조토마테 2017-02-12 176
14769 일반 무서운 컴 견적... [6] 초원의빛 2017-02-08 176
14768 일반 처음 가입하신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4] 무정 2017-01-15 176
14767 동영상 리차드 막스가 제압한 대한항공 난동꾼 영상(욕설주의) [4] 임스킨 2016-12-21 176
14766 불편 공지사항 확인 안한 건 쪽지로 자료 요청한 건. [3] file 별마 2016-12-16 176
14765 불편 물음표느낌표 그리고 트로트 [6] acegold 2016-12-05 176
14764 일반 자료실 이용규정이 변경되었네요. 암울합니다. ㅠ [11] 강시71 2016-09-02 176
14763 일반 주민세... [9] gian 2016-08-16 176
14762 일반 출석체크 1등 어렵네요 [10] 눈탱가리 2016-08-15 176
14761 영국의 5대 발명품 5 [7] 달림이 2016-08-13 176
14760 일반 등업신청합니다. [7] jun218zero 2016-08-10 176
14759 또 올게요 [5] 순두부 2016-08-05 176
14758 동영상 코나EV // LKAS 유지 모듈 장착 // 8분 운전 영상 [10] 일그리고여행 2019-04-28 175
14757 일반 이번 정리부터는 IP와 메일까지 차단을 합니다 [11] Op 2019-01-20 175
14756 일반 G6 배터리 시험실 가보니…“못으로 뚫어도 폭발 안 해요” [3] file 시나브로 2018-09-08 175
14755 슬픔 그 누가 공무원을 꿀빠는 직업이라 했는가? [8] 뽀로로 2018-09-03 175
14754 일반 실시간 검색어 1위는 항상 그분 입니다 [7] file Op 2018-08-31 175
14753 일반 강의실에서 졸고 있는 어머니 [2] file 응딱 2018-07-23 175
14752 고마움 이번 [9] Op 2018-05-15 175
14751 일반 원엠프 스킨 필요하신 분은 가셔서 받으세요(링크) [7] file 히라사와_유이 2018-04-18 175
» 사랑 여보 ,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홍여사- [2] 달림이 2018-04-12 175
14749 일반 채칼 주방(식탁)에 두지 마세요. [4] 밤톨아빠 2018-03-18 175
14748 일반 1953년 서울 컬러 복원 [6] file 논끼 2018-03-12 175
14747 일반 간밤에 비기 와서 CCTV 카메라를 때어 내었다가 다시 달았습니다. [10] file 반돌 2017-05-06 175
14746 일반 컴퓨터 [9] 강글레리 2017-02-09 175
14745 일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 울트라매니아 2017-01-01 175
14744 일반 히타치 [6] file 강글레리 2016-12-29 175
14743 일반 [웃][펌]옷가게 [4] file 쿠닝 2016-12-21 175
14742 일반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3] 강글레리 2016-10-05 175
14741 일반 나는 신발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1] file 응딱 2022-05-10 175
14740 일반 골동품 수준 노트북~ [9] 화성 2016-08-29 175
14739 일반 아...축구 아쉽네요... [3] 밤이면늑대 2016-08-14 175
14738 고충 자료실 등급제한 [7] kssun 2016-08-11 175
14737 고충 무더위 이겨내는 방법 [4] 하임 2016-08-11 175
14736 일반 버그 리포트(갤러리) [4] file 투유 2016-08-05 175
14735 일반 휴가 다녀 오겠습니다. [2] 응딱 2022-07-29 174
14734 일반 티카페 최근 유출한 사람 마인드 [9] file Op 2019-05-23 174
14733 일반 내일 큰 공지하나 나옵니다 [17] Op 2019-03-24 174
14732 일반 LED 묘듈등 교체 시 주의 사항 [4] OS초보99 2019-03-04 174
14731 일반 [알림] Win10 x64 17763.168 5in1 for TWAK(DUAL) 배포 [13] 데스윙 2018-12-07 174
14730 일반 홈플러스 후쿠시마산 제품 [5] file 강글레리 2018-12-03 174
14729 일반 포토샾 전문가분 안계신가요 ...? [8] Op 2018-11-24 174
14728 정보 디지털 다시 됩니다. 티피 2018-11-09 174
14727 일반 아마존에서 발견된 개머리 거미 [3] file 회탈리카 2018-11-09 174